2024.04.01 (월)

대박난 발명품들 100가지 이야기

대박난 발명품들 100가지 이야기 (90) - 한국, 중국, 일본, 이스라엘 등의 역사를 바꾼 이 것.

1895년 11월 5일 전주.  수만의 동학군이 조선 관군을 쉽게 무찌르고 불과 수백의 일본군과 맞이 하게 된다.
하지만 "두두둣...두두두둣.." 하면서 일본군의 기관총에 동학군들은 쓰러지기를 계속했다. 500여 년 역사를 가진 조선이 무너지는 순간이고, 이후로 일본이 조선을 손에 넣고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중의 예루살렘.  휴대용 기관총인 우지를 쏘아대는 이스라엘 공수부대가 요르단 정예부대를 몰살시키고 2000여 년 동안 소원이었던, 하지만 로마, 그리고 이슬람에 의해서 지배당했던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순간이다.  이후로 이스라엘은 적들로 가득 찬 중동에서 생존권을 확보하고 중동의 강자로 등극하게 된다.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바꾸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바꾼 이 무시무시한 대량 살상 무기인 기관총은 누가 발명을 했을까?

1861년 미국의 ‘리처드 조던 개틀링’ 박사는 원래 의사였지만 의술 대신 공학에 삶을 받쳤던 사람이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개틀링은 자신의 고향 인디애나에서 무수한 사상자들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은 병사들뿐 아니라, 질병과 영양부족으로 고통받는 병사들도 많았다. 병사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개틀링은 발사속도를 높인 새로운 총을 개발하기로 한다. 그는  병사 한 사람이 100명의 몫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고, 자신의 이름을 따 개틀링 기관총이라고 명명했다. 

이 총의 특징은 개별 발사장치가 부착된 여러 개의 총신이었다. 손으로 돌리는 L자형 손잡이가 총신을 돌리면서 총위쪽에 있는 탄창 밑을 지나게 한다. 각각의 총신은 12시 위치에서 장전되고 1시 위치에 왔을 때 용수철이 장착된 핀이 총알을 발사한다. 그 후 총신은 아래쪽으로 움직이고 사용한 탄피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결과 한 총신이 발사하는 동안 다른 총신은 자동으로 장전되기 때문에 엄청난 속도로 사격이 가능하다. 

개틀링은 이 기관총이라는 기계가 소총 여러 자루의 화력을 대체해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의 수를 크게 줄일 수 있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그 반대가 되었다. 병사들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고, 개틀링 기관총의 숫자도 늘어나면서 오히려 사상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1883년 ‘하이람 맥심’이란 발명가는 제대로 된 기관총을 세상에 내놓았다. 당대 에디슨과 견줄 정도로 뛰어난 발명가였던 하이람 맥심은 친구들과 사격연습을 하던 중 기관총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즉, 발사 시마다 어깨로 전해지는 반동의 충격에너지를 이용해 탄환을 재장전하는 전자동식 기관총을 고안해낸 것이다. 

맥심의 친구들은 돈을 긁어모으고 싶으면 유럽 사람들이 대규모 시설에서 생산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을 만들라고 얘기해줬고, 맥심은 기관총의 시제품을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가 ‘쇼 케이스’를 벌이며 열심히 홍보했다. 당시 맥심 기관총은 1분에 무려 450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었다. 맥심은 전 세계 군 관계자 들을 불러 모아 놓고 기관총으로 나무를 쓰러뜨리는 시범을 보여주는 탁월한 마케팅 능력으로 사업을 진행시켰다. 

곧 맥심 기관총은 유럽의 표준 기관총이 되었고,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큰 역할은 한다. 기관총 앞에 적의 돌격과 진격은 번번이 가로막혔고 이는 곧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적을 공격할 때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단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대대 하나가 기관총에 녹아 없어지는 일은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그야말로 ‘헬 게이트’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 많은 활약은 한 맥심 기관총. 거의 모든 나라에서 서둘러서 표준 기관총으로 자리 잡았다.
중기관총인 맥심 기관총은 너무 무거워 보병이 이동하며 쉽게 다룰 수 없었다. 따라서 보병들에게도 화력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경기관총이 필요했다. 사진은 루이스 경기관총의 모습. 하지만 이마저도 신뢰성과 성능에 문제가 적지 않았다.

1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 열강들은 기관총의 악몽에 몸서리를 치며 이를 돌파할 수단을 찾고 있었다. 먼저 보병들에게도 기관총과 맞먹는 화력을 제공하자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경기관총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경기관총의 신뢰성이 극히 낮았고, 2차 대전 직전에서야 그런대로 쓸 만한 경기관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처절한 복수를 꿈꾸었고, 여러 분야에서 혁신적인 무기 개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관총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독일은 중기관총이나 경기관총을 따로 개발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기관총으로 경기관총, 중기관총, 심지어 차재 기관총 등 모든 기관총으로 사용이 가능한 다목적 기관총을 개발한다.
바로 MG-42 전설의 시작이다. 독일군은 전작 MG-34가 있었으나 절삭가공방식의 제조방법 때문에 생산단가가 높았고, 결국 철판 프레스 공법으로 제조단가를 낮춘 MG-42를 내놓으면서 기관총의 선진국의 정점에 서게 된다. MG-42는 1분에 무려 1,500발을 탄환을 발사하는 무시무시한 성능과 발사 시 독특한 기계음으로 일명 ‘히틀러의 전기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2차 대전에서 연합군 보병들을 가장 많이 죽인 총기라고 일컬어지는 MG-42 기관총은 당시 연합군 보병들이 두려워할 정도로 가공할만한 성능을 가진 무서운 기관총이었다. 

이 MG-42의 개념은 전쟁이 끝난 후 세계 각국 기관총 운용의 표준이 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베트남전부터 1990년대까지 미군의 주력 기관총이었던 M-60. 디자인이나 운용 개념에서 MG-42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인된다.

이렇게 기관총이라는 인류를 위한 발명품은 아니다.  하지만 이 대량 살상용 무기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왔고, 잘 사용한 나라는 흥하고, 무시한 나라는 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상기 변호사 

·      미국 특허 상표청 등록 특허 변호사

·      로욜라 대학 법대, 법학박사

·       랜다우어 수석 연구원

·       파나소닉 연구원

·       일리노이 주립대학 – 전산학과 석사

·       일리노이 주립대학 - 전산학과 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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